경제상황은 끊임없이 변동한다. 이러한 경제상황의 변동은 법의 대응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시민생활의 기본법이라고 불리는 민법은 이러한 경제상황의 변동에 어떻게 대응하여야 하는가?
이 글은 경제상황의 변동에 초연한 듯 하나 이를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는 민법의 모습을 우리나라 해석론과 입법론을 중심으로 소묘한 것이다. 이러한 민법의 대응방식은 민법의 특성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다. 민법은 재산과 가족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규율을 담고 있는 일반법이고, 그러한 규율은 상당 부분 추상적이고 탄력적인 형태의 조항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민법은 다른 법률들보다 더 서서히 변화하는 양상을 보여왔다. 한편 이로 인하여 발생할 수 있는 경제상황과 민사관계의 간극은 법원의 탄력적인 법 해석이나 특별법의 제정을 통하여 메워져 왔다. 이러한 대응방식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법이 경제상황의 변동에 즉시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하기도 하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점, 시민생활의 기본법으로서 다른 숱한 법률들의 모태가 되는 민법의 지나친 가변성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이러한 대응방식은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민법의 신중성은 계약법의 영역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 글에서는 계약당사자가 미처 계약에 내부화하지 못한 외부의 변수가 계약관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사정변경원칙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사정변경원칙은 이미 민법의 개별 조항들에 산재하여 반영되어 있고, 현재는 판례와 학설의 태도에 따라 이를 일반화하는 조항을 민법에 편입시키려는 움직임이 있다. 사정변경원칙은 경제상황의 급격한 변동에 대한 계약법의 대응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는 것으로서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정변경원칙은 자율적인 계약내용의 형성과 이에 대한 자기책임이라는 계약법의 대원칙에 비추어 예외적으로만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는 사정변경원칙을 정면으로 받아들여 계약을 수정하거나 해소하도록 한 사례가 매우 드물고 이는 외국에 있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결국 경제상황의 변동에 대한 계약법의 대응방식은 서서히 움직이는 민법 전반의 기조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에 비해 불법행위법은 계약법보다 훨씬 다이내믹한 영역이다. 실제 불법행위법은 사회의 변천과 함께 호흡하여 왔다. 경제상황의 변동이 불법행위법의 모습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다. 대량생산, 대량유통의 사회가 출현하면서 제조물책임이 본격적으로 문제되기 시작하였고, 개발위주의 경제정책이 환경보전의 사고방식에 의해 제어되면서 환경침해책임의 논의 빈도가 증가하였으며, 정보통신기술의 급격한 발전 속에서 인터넷과 관련된 사건들이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민법이 가진 틀 자체를 급격하게 변화시킨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불법행위법은 계약법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도 불법행위법은 민법 제정 이래 단 한 차례도 개정된 바가 없다. 결국 이는 불법행위법 자체가 이미 가지고 있던 포괄성과 탄력성 속에서 법관의 창조적인 법 적용이 불법행위법의 모습을 내부적으로 분화시켜 나간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경제상황의 변동에 대한 민법의 대응은 수천년 동안의 검증을 거쳐 온 민법의 기본적인 틀을 크게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이는 이러한 변동에 대해 필요한 법적 대응은 상당 부분 특별법에 맡겨져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민법의 대응방식에 대해서는 상이한 평가가 존재할 수 있다. 민법이 가지는 시민생활의 “기본법”으로서의 속성을 생각한다면 민법이 사법의 기본원리를 담아내면서 법질서의 무게중심을 유지하여 주는 역할을 수행하되 시민생활의 전면에서 발생하는 변화상은 특별법에서 소화하는 현재의 역할분담구도는 부정적으로 볼 것만은 아니다. 다만 현재 민법 개정과정에서 결정되었거나 논의되는 바 - 사정변경원칙의 명문화, 소비자보호나 전자거래에 관련된 규정들의 민법 편입, 법정이율을 시장이율에 연동시키는 법정이율 변동제의 도입 등 – 는 향후 민법이 좀 더 경제상황의 변동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다.